참 걷기 좋은 날씨입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말 그대로 완연한 가을이네요.
걷기 전엔 워낙 큰 도심 사이를 흐르는 하천이라 악취나 환경이 조금 걱정되긴 했습니다만,
한강 못지않게 길도 잘 닦여 있고, 풍경도 좋습니다.
다만, 제가 서울 와서 느낀 점은... 너무 시끄럽네요.
하늘에서 울리는 항공기의 소리, 교량에서 퍼져나가는 열차의 소리,
잊을 만하면 울리는 구급차의 사이렌, 그리고 항상 들리는 차들의 경적, 엔진 소리까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저 모든 소리들이 번갈아가면서 귀를 때리니, 여간 피곤한 게 아닙니다.
그래도 조금 더 걸어서 신도림역에서 멀어지니, 방금까지 저를 괴롭히던 소리들이 하나씩 사라지네요.
이제는 어느덧 신호에 따라 주변이 적막해지는 순간마저 찾아옵니다.
그래요, 사람 사는 곳은 이래야죠.
가끔은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은 순간이 분명 있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길을 따라 아무리 걸어도 기둥의 안내판마다 영등포구 표식이 붙어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부터 관악구지? 하고 지도를 보는데... 관악구가 없네요?
신도림, 대림, 구로디지털단지... 네, 구로디지털탄지까지는 도림천 좌우로 영등포구와 구로구였네요.
지금 한 시간에 3~4Km 정도 움직이는 중인데, 이 속도면 관악구 도착하자마자 밥 먹고 돌아와야 할 기세입니다.
아까 따릉이를 타고 바로 관악으로 넘어가거나, 아예 버스를 탔어야 했네요.
하지만, 너무 걷기 좋은 날씨와 길 아닌가요?
좀 틀어지면 어떻습니까, 수백만 원 내고 와야 하는 곳도 아닌데요.
네, 이번 여행은 사실 영등포구 여행인 겁니다. 대림까지만 걷고, 돌아 나오기로 계획을 수정합니다.
뭐 제비 뽑기 돌리다 보면, 언제 또 관악구 나오겠죠.
넓은 다리 밑으로 어디선가 색소폰 소리가 들려옵니다.
처음에는 아무래도 다리 밑이 으슥하니 환경 개선 차원에서 스피커를 달아 놓은 줄 알았는데, 반대편에서 연주 중이셨네요.
예전에 대만에 갔을 때 공원에서 쟁을 켜던 분이 생각이 납니다.
실력이나, 연주자의 명성을 떠나 음악이 필요한 곳에 음악을 가져다 놓을 수 있는 분이 있다면, 그 순간에는 그분이 최고의 거장이죠.
뭔 공원에 백로가...
지금 보니 천을 따라 오리, 백로, 까치... 확실히 이런 좋은 하천이 있으면 새들부터 돌아오네요.
사실은 위의 도로를 받치는 교량이지만, 어째 피암터널의 느낌도 살짝 납니다.
유명한 신전처럼 엄청난 비례는 없지만, 수직으로 균일하게 이어진 배치는 분명 단순한 기둥 이상의 느낌을 주네요.
별 거 아닌 근처의 공간도, 여유를 갖고 천천히 둘러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가 모여 이런 사소한 여행기를 쓰게 해 주죠.
꽤 걸었는지 슬슬 허기도 지고, 한국 사람이라면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영등포를 끼니까지 거르며 둘러볼 이유는 없죠.
요즘 대림동이 그렇게 중국 문화를 맛보기 쉽다는데, 어느 문화던 시작은 요리 아니겠습니까?
계단을 올라, 대림동으로 향해 봅니다.
2024. 11. 03
영등포 - #4. 고추말, 경인로 (1) | 2024.11.12 |
---|---|
영등포 - #3. 대림동, 도림동 (2) | 2024.11.10 |
영등포 - #1. 경인로 (0) | 2024.11.06 |
인천 - #4. 예단포, 운서카페거리 (0) | 2024.06.27 |
인천 - #3. 하늘정원, 인천국제공항 (1) | 2024.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