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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꽤나 과음을 한 모양인지 아침부터 식욕도 없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내려가서 평소처럼 밥을 받아오긴 했는데, 영 끌리지가 않는다. 된장국이랑 요거트로 대충 속을 달래고 누워서 굴러다니다 숙소를 빠져나온다.

 


걷기엔 애매한 거리라 전차를 타기 위해 스스키노에 나왔다. 삿포로에는 전부 후줄근한 전차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제법 세련된 모양의 전차가 온다.

  


전차를 타고 나카지마코엔도리 역에 내린다. 아무래도 평일이기도 하고, 출근시간을 지난 애매한 시간이라 그런지 동네가 한층 더 한적해 보인다.

 


날은 잔뜩 흐렸지만, 덕분에 무덥지는 않은 날씨다. 나카지마코엔(공원) 안에는 아야메(붓꽃)이케가 있는데, 그 일부가 여기까지 흐르는 모양이다. 홋카이도도 같은 시기에 피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5월은 지난 지 한참이라 그런지 붓꽃은 보이지 않는다.

 


뭔가 홋카이도 개척시기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호헤이칸이라는데, 당시에 호텔로서 지어진 건물이라 한다. 당시 덴노이던 메이지 덴노가 행차할 때 주재소로 쓰인 건물이라 그런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 중이다. 얼마 전 인천에서도 대불호텔이 복원되었는데 이곳과 함께 보면 재밌을 것 같아 들어가 보기로 한다.

 


인도에까지 들어와서 돌아다니던 오리들, 사람이 다가오니 풀밭으로 같잖은 도망을 친다.

 


내부의 샹들리에부터 눈길을 끈다. 사실 굉장히 여러 조명이 있었고, 조명 사진을 하나하나 담는 것만으로도 제법 즐거운 경험이었다만 막상 사진으로 가져와서 보니 그때의 그 느낌이 들지 않아 아쉽다.

 



내부는 2층까지 공개되어 있는데, 덴노 행차 시 사용된 물건이 전시된 공간과, 당시의 물건 배치를 재현한 공간 등 꽤 알차게 이루어져 있다. 전부 그 시대의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배치된 물건들이 고급스러우면서, 시간을 먹은 티를 내서 돌아보는 내 즐거웠다. 1층에서는 간단한 다과를 팔고 있었는데, 개점시간이 되도 점원이 보이지 않아 그냥 의자에 잠시 앉아 있다가 떠나기로 한다.

 


어차피 공원이니, 발 가는 데로 움직이기로 한다.

 


공원 안쪽에 왠지 눈길을 끄는 건물이 보인다. ‘핫소안이라는데, 굳이 뜻이라도 할 것도 없이 여덟 창문이 있는 암자란 뜻이다. 에도 말기에 사가 현에 지어진 찻집이라는데, 사가 현이면 교토 바로 옆이건만, 도대체 무슨 경위로 여기까지 옮겨왔는지 알 길이 없다. 혹시 이 집 차가 너무 맛있어서 건물 채로 높으신 분이 옮겨버린 건가?

 



핫소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하늘이 영 우중충 하지만, 길가는 물론이고 눈 닿는 곳마다 온통 초록색으로 가득 차 눈이 아주 편안하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다시 호헤이칸건너편에 도착했다. 근처에 빈 벤치가 보여 조금 앉아 쉬다 가기로 한다.

 


살다 살다 오리를 보며 해장을 하는 건 처음이지 싶다. 가만히 앉아 물이나 마시면서 오리들이 풀밭을 헤집고 다니는걸 보다보니 술이 깨기 시작한다. 오리는 먹는 것 말고도 보는 것만으로도 뭔가 건강에 좋은 효과가 있는 걸까? 뭐 일단 속도 편해졌으니 슬슬 다음 장소로 이동해보자.

  


이번 여행의 마지막 끼니를 때우기 위해, 다시 스스키노로 돌아간다.



스스키노에 있는 장어덮밥 전문점인 카도야에 도착했다. 개점까진 5분 남았는데, 그래서인지 주방이 굉장히 바빠 보인다.

 


자리에 앉은 뒤 오타루 비어를 한 병 시켜 갈증을 달랜다. 뭔가 홉이 잔뜩 들어간 카스의 식감이다. 개인적으로 홉 향이 강한 맥주를 좋아하는지라 몹시 만족스럽다. 우리나라 맥주도 홉 향 좀 더 강하게 넣어주면 좋으련만...

 


영롱한 빛깔의 장어들이 줄지어... 말이 필요없다. 이게 맛없기도 힘들 것 같다.

 


순식간에 덮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뒤, 샐러드와 함께 남은 맥주를 비운다. Bloody Fresh!

 


가게 밖이 뭔가 연기가 자욱하다 했더니, 방금 나온 장어 가게에서 연기를 엄청나게 뿜어내고 있다. 생선을 구우면 미세먼지가 나온다는 말이 진실이었다.

 


디저트를 먹기 위해 근처의 미루쿠무라에 둘렸건만, 가게가 굳게 닫혀있다. 다른 가게를 갈까 하고 밖으로 나오니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한다. 이번 여행은 여기까지구나 하는 생각에 호텔로 가 짐을 꺼내 공항으로 향한다.

 


공항으로 향하는 열차를 기다리며 밖을 보니 빗방울은 점점 굵어져간다. 가보고 싶었던 곳을 다 못 간 건 아쉽지만, 덕분에 가 볼 생각이 없었던 곳까지 가볼 수 있었으니 나름 전화위복으로 삼으면 되겠지.

 


공항에서 후다닥 수속을 마치고 라운지에 들어왔다. 카드 손님은 오른쪽으로 가라고 해서 갔더니 음식 하나도 없이 음료와 사탕만 가득이다. 500엔에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팔고 있었는데, 몇 번인가 유혹에 넘어갈 뻔 했다만 별로 좋아하는 종류의 맥주가 아니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귀국하는 항공편은 조금 지연이 됐지만, 돌아가서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로밍도 돌아갈 시간에 맞춰 딱 끝났고, 뭔가 이젠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어진다.



원래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사진이 됐을 사진이지만 비행기 안에서 사진을 더 찍게 될 줄은 몰랐다. 일단은, 즐거웠던 나흘을 카메라와 수첩에 담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홋카이도 남단의 스루가 해협에 비행기가 들어서기 시작한다. 날은 잔뜩 흐렸던 것 같은데, 이상할 정도로 시계가 좋다. 저 아래로 도마코마이의 항구와 공장이 보인다.

 


동해를 건너는 내내 흐렸던 하늘이 갑자기 걷히기 시작한다. 아래 풍경을 보니 어떻게 봐도 한국이지 싶다.

 


평택 즈음을 지나 서해에 다가갔을 무렵, 저 멀리 구름 사이로 햇볕이 내려오기 시작한다.

 


다시 창밖에 흐려진다 싶더니, 마지막 선물로 무지개를 보여준다. 아마 살면서 가장 가까이에서 본 무지개가 아닐까 싶다.

 


, , , , 직장 모두 이곳에서 살아서 그런지, 하늘에서 봐도 어디가 어딘지 훤한 곳은 역시 이 동네뿐이다. 나흘간의 기분 좋은 도피를 마치고 다시 일상에 착륙한다.

 

2018.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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