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곳곳을 다니다 보면, 정말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것들이 종종 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들어갔던 카페가 내가 좋아하던 작가가 다니던 곳이라던가,
그냥 올라갔던 산 위의 정자가 옛 유명한 문인이 마지막을 함께했던 장소라던가 말이죠.
석모도의 분식집을 찾아 해안가를 타고 운전하던 중, 왼쪽으로 슬쩍 '천상병'과 '귀천'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밥을 먹으며 찾아보니, 천상병 귀천공원이라는 곳이 있었고 예전부터 좋아하던 문인이었던지라 귀갓길에 한 번 들러봤습니다.
주차장은 따로 없었는데, 조금 앞쪽에 건평항이 있어 그쪽에 주차할 수 있었네요. 따로 막는 시설이나 요금은 없었습니다.

건평이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선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한자 뜻 그대로 건조한 들이 펼쳐져 있다 해서 건평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고, 하늘과 땅이 맞닿는 곳이어서 건평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이곳의 낙조를 본다면 전 전자보다 후자의 유래가 더 그럴싸하다 생각되네요.
땅이야 뭐, 건조할 때도 있고 습할 때도 있는 거죠.
건평항 쪽 입구에는 강화도 출신의 선비인 화남 고재형 선생의 한시가 남아 있습니다.
심도기행이라는 글을 쓴 분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심도는 강화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구한 말 강화도 일대의 마을, 민속 등을 주제로 한시를 남겼다 하는데, 이 또한 그중 일부인 듯하네요.
아쉽게도 현대에 와서 출간된 책은 보이지 않아 읽어보려면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공원은 여느 지방의 공원처럼, 적당히 관리된 상태입니다.
오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크게 훼손될 일도 없을 것이고, 이제 막 여름으로 접어드는 시기이니 화단도 한 번 정리해서 깔끔합니다.

강화, 영종, 무의 등 이 일대의 옛 사료를 보면 목장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아무래도 말이 바다를 건너 탈출하긴 힘드니, 수도와 가까운 섬에 목장을 두면 말을 방목해 가며 기르기 좋았겠죠.
강화도도 예외는 아닌지라 이 근처 진강산 일대에 진강목장이 있었다 합니다.
뭐...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의 팔준마 중 한 마리가 진강목장에서 나왔다는 전설부터,
효종의 북벌을 위해 길렀던 말들을 키웠다는 얘기, 그중 명마였던 벌대총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모양이네요.
시대가 지나 효종 시절의 청나라와 조선의 국력을 뻔히 아는 우리로서는 조금 냉소적이게 될 수 있는 이야기네요.
그나저나 진강산 꼭대기에 말발굽 바위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여기 이 자국은 뭘까요? 이것도 말발굽 자리일까요?

천상병 시인의 동상이 있다 해서 왔는데, 어째 어린 왕자가 다 커서 앉아 있습니다.
음... 뭐 일단 좀 더 안쪽으로 가볼까요?

한상억이라는 성함으로 검색하니 비슷한 시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나와 깜짝 놀랐습니다만,
이 분은 이록 한상억 선생님이셨네요.
옆에 같이 적힌 최영섭 작곡가 님과 더불어 강화 출신 인물이신데 그래서 여기에 이렇게 비석을 세워둔 것 같습니다.
지역 출신의 훌륭한 인물을 기록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공원이 잡은 특색이 조금 희석되는 듯한 생각도 듭니다.
아무래도 저 노래를 불러보거나 들어본 적 없는 세대인 저는 천상병 시인과 인지도가 크게 갈려서 더 그렇게 느껴지지 않나 싶네요.

뒤로 조금 더 가 보니, 드디어 천상병 시인의 동상이 나왔습니다.
술꾼으로 유명했던 고인답게 막걸리 한 잔 들고 계시는군요.
저 모자는 누가 씌워줬는지, 참 잘 어울립니다.
자세히 보니 손목에 꽃팔찌도 하고 계시군요.

천상병 시인의 공원이 이곳에 있는 게 조금 뜬금없어 보일 수는 있지만,
생전 고향인 마산 바다를 그리워했지만 찾아갈 수 없던 고인은 이곳 건평 앞바다를 자주 찾곤 했다고 합니다.
막걸리 한 병은 덤이었겠죠.
천상병 시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귀천도, 이곳에서 시상을 얻고 작성한 시라고 하네요.

앞에서 볼 땐 그저 웃는 얼굴로 보이던 얼굴이 옆에서 보니 조금 슬퍼 보이기도 합니다.
귀천이라는 시가 주는 울림만큼이나 그분의 인생 또한 굴곡이 컸죠.
서슬 퍼런 군부독재 시기에 동백림 사건으로 잘못 엮이게 되며 고초를 겪고, 정신과 몸 모두 망가졌던 시인은 정신병원에까지 가게 됩니다.
그 사이에 천상병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료 시인들이 작품을 모아 낸 시집이 바로 귀천이 수록됐던 유고시집 '새'입니다.
생전에 유고시집이 출간된, 전무후무할 일이었죠.
다행히 그가 입원됐던 병원에 문학을 좋아하던 담당의사가 있었고,
천상병의 유고시집이 출간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 환자가 천상병이 아닌지 확인하게 됩니다.
동료들이 이를 확인하며 다시 사회로 돌아왔지만, 이후에도 그 후유증에 많은 고생을 하게 되죠.
자연인 같은 그의 삶과, 아름다운 시로만 알던 고인입니다만,
그의 인생을 찾아보게 되면 의외의 굴곡에 씁쓸함을 느끼게 됩니다.

누가 여기다 막걸리 한 잔 따라주고 가는 경우도 있다는데,
저도 차를 안 가져왔으면 한 잔 따라 놓고 남은 건 제가 다 마시고 들어갔을 것 같네요.
있는 것은 천상병 시인의 동상 하나가 전부인 천상병 귀천공원.
하지만 시인이 시상을 느낀 풍경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곳의 공원 이름이 귀천임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아! 근처에 막걸리 파는 곳 하나는 있는 게 좋을 것 같긴 합니다.
막걸리 한 잔 하고, 낮잠 퍼질러 자고 해질녘이 되면 앞바다 풍경 한 번 즐기고 돌아가는 건 어떨까... 생각만 해도 너무 좋네요.
천상병 시인이 느낀 그리움은 함께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돌아가고 싶은 하늘은 함께 볼 수 있겠죠.
천상병 귀천공원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888-2
2026. 05. 21
| 카페리 (영종도 - 월미도) (0) | 2025.05.10 |
|---|---|
| 인천공항전망대 (오성산) (5) | 2024.10.05 |
| 영종씨사이드파크 바베큐장 (0) | 2023.12.13 |
| 일본 입국, Visit Japan Web (1) | 2023.04.11 |
| 아시아나항공 항공권 이름 변경 (0) | 2023.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