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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에 관하여

바다지기 2022. 11. 19. 07:02 댓글확인

 

지난번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을 읽으며, 무신론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더 듣고 싶어 졌습니다.

관련해서 읽을 만한 책들을 찾던 중, 흄의 저서들 중 '기적에 관하여'가 가장 흥미가 생겼네요.

 

사실 페이지를 조금 넘기고 나서 약간은 후회했습니다. 편하게 읽기엔 머리가 아파오는 내용 들이었거든요.

다만 그럼에도 기적에 관해서, 더 나아가 거기서 시작되는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한 때, 종교를 가졌지만 어느덧 그 존재마저도 믿지 않게 된 저에게는 조금 더 마음이 동하는 이야기였을 수도 있겠네요.

 


 

충분히 자격 있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기적이 증언된 경우는 유사 이래 찾아볼 수 없다.

 

기적, 말 그대로 흔히 일어나지 않는 일을 의미합니다. 거기에 더해 방향성이 기적을 경험한 사람에게 좋은 방향이기도 하죠.

모든 기적은 증언에서 시작됩니다. 신기하게도 수많은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기적은 증언에 의존적입니다.

기적을 증명할 만한 원리도 배경도 없이 그저 일어났으며, 그것을 목격하고 경험한 사람들의 구전에 의해 기록이 남겨집니다.

 

다만 아쉽게도 어떠한 기적에서도 신뢰할 만한, 관계가 없는 대다수의 사람이 증언을 한 기적은 없습니다.

대개 기적을 설파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그 종교에 속해 있거나 아니면 큰 신뢰를 얻지 못하는 위치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한두 건의 기적에서 이러한 일이 생겼다면 우연이지만, 유사 이래 수많은 기적 사례들이 같은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과연 모두가 공유하는 기적이란 존재하는 걸까요.

모두가 공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제 기적이 맞을까요?

 


 

인류의 일상적인 성향은 신비한 것을 향한다.

 

흄은 이러한 기적적인 것들, 초자연적인 것들은 인간의 일상적인 성향에서 추구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성향은 식견과 학식을 통해 종종 제어를 받기는 하지만, 결국 본성에서 철저히 근절될 수는 없다고도 하죠.

 

조금 더 나아가, 무지하고 미개한 사람들은 거짓된 사실을 널리 퍼뜨리며

이러한 거짓된 사실을 반박할 능력이 없기에 신비한 것을 향한 본성을 더욱 철저히 따른다고도 말합니다.

 

확실히, 많은 기적 사례들이 먼 옛날 농촌, 가난한 농부, 어린아이들, 부녀자에게서 일어났다는 점을 생각하면 흔히 말하는 식견 있는 사람의 책임 있는 간증은 그리 흔치 않습니다. 제가 느끼기로는 이는 현대에 와서도 마찬가지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기초 교육이 보급되고, 전반적인 교육과 생활 수준이 높아질수록 기적의 체험은 줄어드는 것이 아닐까요.

기적과 같은 일들은 왕왕 일어나지만, 어디까지나 살면서 일어날 수 있는 우연의 범주를 넘지 않는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과연 낮은 확률을 뚫고 일어나는 것도 기적일까요?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 기적일까요?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일어났다면 그것은 작은 확률이라도 존재한다는 것이니까요.

그러면 그 작은 확률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 신의 뜻일까요?

 

책에서는, 기적이 신앙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기적을 만드는 것이며.

기적은 결국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신앙이라 말합니다.

 

그렇기에 흄은 어떠한 일을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신앙에 의한 해석이자 종교적인 주장이라 말합니다.

따라서 기적은 종교의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을 근거할 수 없으니까요.

 

심지어 기적이 신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해도 우리가 믿고 있는 바로 그 신의 개입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백번 양보해 기적이 신의 섭리일지라도, 우리는 그 섭리가 어느 신의 섭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설령 기적의 존재를 인정하더라도 특정한 종교의 근거는 될 수 없다는 말이죠.

 


 

신의 존재에 대해 다루는 글들을 읽을수록, 어쩌면 신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무신론자로 알려진 많은 사람들은 의외로 신을 부정하지 않으니까요.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지고지선한, 우리의 삶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심판하는 그런 신은 없을 것이라 말합니다.

이번 책은 그런 신들이 일으켰다 말하는 기적들에 관해 깊이 있는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책이었네요.

 

문외한이 지나가듯 읽어서는 그 깊이를 다 헤아리지 못했지만,

드문드문 잠깐 피식하면서 깊게 읽을 수 있는 구절들이 많아서 즐거웠던 독서였습니다.

 

다음에는 한 번 소설을 읽어봐야겠어요.

조금 머리가 덜 아픈 글을 읽고 싶어 졌네요.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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